동로마식 장판파 : 용장 비산두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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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년 그 유명한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 시를 수복했습니다. 그러나 수복은 상처뿐이었지요.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동고트왕국의 왕 비티게스는 이미 로마 시가 전략적 경제적 효용성을 다한것을 알고있었기에 성벽을 대부분 때려부수고 청야전술을 쓴 뒤 이탈리아의 실제적 중심지가 된 라벤나와 메디올라눔에서 대군을 모으기 위해 로마 시를 일부러 버렸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인프라도 이미 다 박살나고, 인구만 15만이라 먹일 입만 잔뜩 남은 로마시에 매달리게 만드려는 좋은 전략이었지요.
그 사실을 아는 벨리사리우스였지만 그들에게 있어 로마 시는 버릴 수 없는 갈망의 땅이었습니다. 이미 교황이 벨리사리우스에게 직접 찾아와 로마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가운데, 벨리사리우스는 1000여명의 훈족과 용병대, 5500여명의 코미타텐세스 기동야전군, 그리고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 중기병대, 부켈리아리로 이루어진 7500명만으로 식량도, 수도교도 끊긴 도시를 수비해야 했습니다.
정찰병들은 동고트족이 북방에서 무려 15만명의 강병을 이끌고 내려온다는 첩보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이 라벤나에서 출발해 로마까지 도착할 시간은 겨우 몇개월 뿐이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그 3개월간 남이탈리아에서 식량을 쟁여오고, 티베레 강에 서있는 다리들을 요새화했습니다. 서로마인 3000명을 징집해 병력을 확충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적은 15배가 많았지요.
<심지어 다리 건너에 있던 옛 로마 황제들의 묘지를 성으로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기 전부터도 요새화되어가던 하드리아누스 영묘는 더더욱 보강되어 산탄젤로 성으로 불리며 교황청의 방어요새로 천년 뒤까지 쓰입니다.>
로마 수복 후 3개월째 되던 날. 비티게스가 보낸 45000명의 선봉대가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로마시 외곽까지 진군해왔습니다. 플라미니아 가도를 타고 내려온 이들은 플라미니아 가도와 로마 시의 경계인 요새화된 밀비우스 다리(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를 이긴 그곳입니다.)의 방어군을 순식간에 짓이겼습니다.
방어군은 로마에 있는 본대에 패배소식을 알리지도 못한 채 전멸했고, 고트족은 생존자들을 심문하여 그 유명한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흰 얼굴을 한 적토색 말을 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필, 그날은 벨리사리우스가 로마 인근 방어를 점검하기 위해 근위 기병대만을 이끌고 밀비우스 다리 요새를 시찰하는 날이었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밀비우스 다리에 도착하기 직전, 다리의 건너의 요새가 함략당했던 것이지요.
벨리사리우스가 다리를 건너려 하는 순간, 4만 5천명이나 되는 동고트족이 그를 포위했습니다. 고트족들은 소리쳤습니다.
《흰 얼굴을 한 적토색 말에 탄 자가 벨리사리우스다! 죽여라!!》
기번의 기록에 따르면 천명의 고트족 궁수가 명령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투창과 화살을 벨리사리우스에게 날렸다고 합니다. 근위 기병대 부켈리아리만을 끌고 온 벨리사리우스는 곧 죽음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벨리사리우스 시절보다 약 60여년 전의 부켈라리 기병대의 고증도입니다. 벨리사리우스의 시대에도 대강 비슷한 모습이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근위기병대 부켈리아리 부대는 단순한 중기병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징집된 상비군이 아닌 그의 가신 기병대로, 그와 수십년간 동거동락하며 잠도 같이 자고, 한솥밥을 먹은 가장 충성스러운 자들이었죠.
(부켈리아리라는 단어 뜻 자체가 '군용 비스킷을 함께 먹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컴패니언과 비슷하게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부켈리아리 부대의 기수장인 비산두스가 몸을 날렸습니다. 당시 중기병대는 등자가 없었기에 말 위에서 방패를 자유자재로 쓰기 어려웠습니다. 그렇기에 비산두스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려 자기를 희생한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벨리사리우스의 방패를 자처하며 밀비우스 다리 뒤에서 수많은 동고트족을 막아섰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비산두스는 수 많은 고트족을 베어넘겼습니다. 너무나 많은 공격을 맞았음에도 이 장사가 체중을 실어 일격을 휘두를 때마다, 고트족 병사들의 칼과 창이 부러져나갔습니다.
결국, 벨리사리우스의 방패, 장사 비산두스는 수만의 고트족들에게 둘러쌓여 죽음을 맞았습니다. 고슴도치가 된 그의 시신에는 열세 군대의 치명상이 선명했습니다. 적이었던 동고트족마저, 그의 용감함에 경의를 표할 정도였지요.
그의 희생 덕에 벨리사리우스는 그의 로마 시에서 나온 중기병 천명과 합류할 수 있었고, 그들의 역습으로 로마군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비산두스가 없었더라면, 벨리사리우스의 서방 수복 원정은 그날 끝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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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비산두스의 희생으로 포위에서 탈출한 벨리사리우스는, 로마 성벽의 북동문인 플라미니아 게이트까지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만... 성 안의 병사들은 동고트족의 숫자를 보고는 겁에 질려 벨리사리우스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벨리사리우스는 그를 도우러 나온 1000명의 부켈라리만을 이끌고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기에 역습을 했던 것이었답니다...
비산두스의 충심을 빛바래게 만들 뻔한 일화였지요.